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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다른 즐거움/그냥쓰기

노란 병아리

천진 김 2021. 10. 1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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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시대에는 국민학교라고 했었다.
그 시절 수업이 끝나고 집에 가기 위해 후문을 나오면 이내 발길을 잡아 두는 곳이 두 곳 있었다.
첫 번째는 담장을 끼고 자리 잡고 있는 떡볶이 포장마차였다.
당시에는 가느다란 밀가루 떡을 달콤하고 매운맛의 궁합으로 하굣길을 붙잡아 세웠다.
그리고는 문방구 앞 연탄불에 옹기종기 모여서 국자에 설탕을 넣고 녹이다 소다를 넣어 회색으로 부풀어 오르면 철판에 탁 부어 누른 후 별 모양을 찍어 조심스레 띄어내면 성공의 대가로 한 번 더 할 수 있는 기회를 주던 달고나였다.
나도 그 두가지의 유혹을 버텨내지 못하고 어렵게 얻은 용돈을 탈탈 털어내고는 했다.
부모님들도 가끔 그 맛을 느끼라고 주셨던 것이라고 이제는 생각이 든다.
그러던 어느날 그 두 즐거움을 모두 뒤로하고 한 곳에 모두의 시선이 모아져 있었다.
그곳에는 노란 병아리들이 가득 든 상자가 놓여 있었고 삐약대는 지저귐과 작은 움직임에 모두들 어쩔 줄 몰라 보고만 있었다.
그때도 부모님이 하교를 데리러 오는 아이들도 있어서 그 이아들이 부모님을 졸라 작고 귀여운 노란 병아리를 사들고 가는 모습이 부러워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하면서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가진 돈은 떡볶이 한컵이나 달고나 한판 중 하나만 할 수 있는 돈이 었기에 병아리를 살 수는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상자 안의 병아리들은 하나둘씩 제 주인을 찾아가고 있었고 상자 안의 숫자는 줄어들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점점 아이들도 다들 떠나갈 때 가지못하고 자리를 지키고 있는 나에게 아저씨는 살 거 아니라면 빨리 가라는 야속한 소리만 할 뿐이었다.
나는 하교길 최애템인 떡볶이마저 포기하고 지켜보던 중이라 아저씨 말에 병아리 보는 것을 포기하고 포장마차를 보았을 때는 이미 모두 팔리고 장사를 접는 중이었다.
내게 선택지는 이제 집으로 가는 것 밖에는 없었다.
이미 아이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학교 후문에 나만이 횡덩그러니 남아있었다.
그때 병아리를 팔던 아저씨가 내게 얼마를 가지고 있느냐고 물었다.
당시 내게는 오십원이 못되게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뭐 기억은 잘나지 않지만 병아리 값은 되질 않았다.
아저씨도 이제는 집에 가야 한다며 가지고 있는 돈으로 한 마리만 가져가라고 통 큰 제안을 해왔다.
나도 그 병아리를 갖고 싶어서 긴 시간을 집에 가지도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기에 연신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호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값을 치르고 두 손 위에 병아리를 올려 조심스럽게 집으로 왔다.
집에 오는 동안 손바닥에서 혹시라도 병아리가 떨어질까봐 늦었는데도 뛰지 못하고 조심조심거리며 천천히 걸어 집으로 왔다.
부모님은 다른 아들은 다 집으로 왔는데 오지 않는 나를 장사를 하시면서 걱정스럽게 기다리고 계셨다.
너무 늦어서 혼날거라는 생각도 있었지만 그래도 삐약거리는 병아리를 보면서 걱정이 되지는 않았다.
두 손에 병아리를 들고 집으로 들어오는 나를 보고 엄하던 아버지도 어이가 없으셨는지 화를 내지 않으셨다.
다만, 쓸데 없는 곳에 돈을 사용했다는 말씀은 잊지 않으셨다.
그렇게 야단맞지 않았고 어머니는 박스의 윗부분을 자르고 병아리 집을 만들어 주셨다.
나와 내 동생들은 삐약거리며 마루를 활보하는 병아리를 보면서 신기한 듯 웃음꽃을 피웠다.
병아리를 운동 시킨다고 마루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기도 하고 손바닥에 올려 머리를 쓰다듬기도 하면서 저녁이 될 때까지 병아리 주위를 떠나지 못했다.
그렇게 저녁이 되었을 때 병아리는 눈을 감고 졸기 시작했다.
우리는 낮에 운동을 너무시켜서 피곤한가보다며 병아리를 벅스에 뒤고 좁쌀을 물에 이겨 놓고 잠이 들었다.
그것이 병아리와의 마지막이 될거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 우리는 셋이서 쪼르르 달려가 병아리가 있는 박스로 갔고 눈을 감고 잠들어 누워있는 녀석을 손가락으로 톡톡 쳤다.
그러나 아무 반응이 없었다.
하룻밤 사이에 녀석은 싸늘한 시체가 되어있었다.
우리 셋은 어쩔줄모르고 울음을 터트렸다.
아버지는 병아리가 아파서 죽은 것이라고 우리를 달래주셨다.
그때는 알 수 없었지만 이미 병이든 병아리를 파는 것이니 다음번에는 사 오지 말라고 말씀하셨던 것 같다.
당시 우리들의 아버지는 감성적이지 않으셨다.
아니 그 당시의 아버지들에게는 그런 상황에서 아이들의 감성을 다치지 않고 설명해야한다는 자녀교육 방법이 없었다.
현실을 가르쳐야한다는 것이 올바른 교육방법이었던 것 같다.
지금에서야 감정을 다치지 않고 올바른 대처를 하는 교육이 중요하다고 말하지만 당시에는 그렇게 현실을 얘기해주어도 크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나름대로 받아들이고 스스로 정리가 되었으니 말이다.
아무튼 우리는 죽은 병아리를 손에 들고 개울가로 가서 땅을 파고 묻어주었다.
하늘나라로 잘 가라는 기도도 잊지 않고 해 주었다.
어린 시절 노란 병아리는 그렇게 하루 만에 우리 곁을 떠나갔다.

그러나 정이 들지 않아서였는지 금방 잊혀졌고 다른 것에 집중할 수 있었다.

아마도 정이 들지 않았다기 보다는 그 시대에는 다른 것에 관심을 돌릴 수 있었던 많은 것들이 존재했기에 상처받지 않고 잊혀졌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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