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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가 주는 힘/2019년 독서록

토지9권

천진 김 2019. 3. 29. 08: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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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네 권은 평사리, 2부 네 권은 용정이 주무대였다. 9권째에 들어서 3부가 시작되었고 무대는 평사리 가까운 진주로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무대는 한 곳에 머물지 않는다. 평사리, 지리산, 전주, 서울, 용정, 하얼빈을 넘나든다. 오다니기 엄두내기 어려웠던 곳들이지만 장이 바뀔 때마다 무대가 되어 나타난다. 9권에는 3부의 1편 '만세이후' 18장 전체와 제2편 '어두운 계절'의 5장까지를 담고 있다.

서희 일행이 진주로 돌아온 후 몇 해가 흐른 듯하다. 그 새 3.1 만세운동이 있었다. 만세운동 이후의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만세운동은 전국 각지로 퍼져나갔고 많은 이들이 옥고를 치렀다. 선생이 되어서 아이들을 가르쳤던 석이도 그랬고, 공노인을 도왔던 임명빈도 그랬다. 강쇠의 이종사촌동생 짝쇠도 그랬다.

상현은 여전히 방황한다. 한사코 집에는 돌아가지 않고 서울에 머물러 있다 전주행을 하여 기화를 만나기도 한다. 나라를 위한 고뇌는 있으나 실질적인 행동은 없다. 마음은 있으나 상처만 받은 그저 한량에 지나지 않는다 해도 할 말이 없다.

서희와 길상 못지 않은 비중을 가지고 있던 사랑꾼 용이가 쓰러진다. 용정에서는 활달했던 홍이는 진주에서는 방황한다. 마음으로 따르던 어미 월선은 부재하고 마음이 외면하는 생모 임이네는 함께 였기에 더욱 그렇다.

관수가 한복이를 찾아간다. 한복이는 형 거복이를 만나기로 결심한다. 전혀 다른 길을 걸었던 형제가 길고 길었던 이별을 끝낸 곳은 용정이었다. 간도일대에서 이름난 밀정이고 인정사정없는 냉혈한인 거복이 김두수지만 한복을 만나는 지점에서는 눈물을 쏟는다.

이번 권의 하일라이트는 서희와 조준구의 만남이다. 모든 독자들은 더 시원한 무언가를 기대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쉬운 장면으로 남겨지게 됐다. 일면 통쾌하기도 했으나 서희를 통해서 더 강한 카타르시스를 기대하고 있었기에 부족하게 느꼈다. 하지만, 박경리 선생은 그의 이 소설을 영화처럼 극적으로 만들려하지 않았던 듯 싶다. 우리의 삶이 똑 뿌러지지 않듯, 소설인데도 논픽션의 느낌을 확실히 주었다고 해야겠다.

두만네 가족 이야기가 오랜만에 길게 나왔다. 시집간 선이는 꽤 잘 살고 있다. 이제 서른 다섯이지만 벌써 손주를 본 할머니다. 두만이의 본처 막딸이를 애처롭게 생각하고 읍내에 나서지만 딱히 효과는 없다. 평사리에서 대부분의 남자들이 최참판댁 고방을 털어 산으로 들어갔을 때 두만네 남자들은 그곳에 없었다. 그게 그들에게는 마음의 짐이다. 시집의 사촌시동생 영학이 서희네서 일을 봐주고 있지만 영 껄끄럽다.

김환을 비롯한 동학일파는 파가 갈리어 갈등이 있다. 그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독립운동이 어떤 식으로 전개되고 있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다. 안에서 힘쓰는 이도 있고 밖에서 힘쓰는 이도 있다. 드러내서 일을 벌이는 이도 있고 숨어서 돕는 이도 있다. 사람들의 일인지라 그 안에서도 명분이 중요하고 명예도 중요하다. 지삼만의 생각도 일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김환은 더 크게 보자고 한다.

금녀는 결국 안타깝게 죽고 만다. 김두수의 악착같은 추적에 걸려들고 만 것이다. 장인걸과 함께 더 큰 역할을 하리라 기대했지만 오히려 김두수의 활약에 밀리는 형국이다. 최재형도 죽고 박재연도 죽었다.

명희의 이야기가 새롭게 전면에 나올 참이다. 아직은 운만 띄운셈이다.

길상은 송장환과 뜻을 같이 하며 간도일대에서 활동을 하고 있다. 한복을 서서히 이끌어 갈 듯 하다. 잠깐 나오고 사라진 듯 했던 주갑도 그곳에 있었다. 한복과 주갑은 함께 어울리며 친해졌다. 고향으로 가는 길에 동행하기로 하는데, 아마도 그 전에 무슨 큰 일이 있을 것 같다.


“그런 말씸일랑 안 하는 것이여. 못 다 살고 가면 차생에서 또 고생할 것인께로 살아보는 데꺼지 살아보고서.”

“주, 죽을 수가 없어서…… 여까지 왜 왔는지 모르겠어! 와서 생각하니…… 강물에 빠졌는데 이 못난 놈이 기어나오질 않았겠소? 으흐흣…….”

흐느껴 울더니 종내는 통곡이다. 여느 사람의 반밖에 안 되는 몸뚱이, 그나마 가죽과 뼈만 붙은 듯 여윈 몸뚱이는 멍들고 껍데기가 벗겨지고, 죽으려고 얼마나 처절하게 싸웠을까. 명이란 질기고도 긴 것. 영산댁은 행주치마를 걷어 콧물을 닦는다.

조준구의 아들 병수는 조준구와 너무 달랐다. 몸은 곱추라 성하지 않았지만 심성은 지극히 맑았다. 영산댁의 충고가 간결하게 설득을 하고 있다. 못 다 살고 가면 차생에 또 고생할 것이니 지금 최선을 다해 살아보라고...

여한(餘恨)과 미진(未盡), 울분을 풀 길 없는 밤이었다. 관수나 석이에게도 그랬었지만 서희라고 후련한 밤이었을까? 여한은 마찬가지, 이제 서희는 무엇으로 지탱할 것인가. 조준구가 걸어오지 않는 이상 보복은 끝난 셈이다. 간도땅에서 이를 갈며 맹세한 보복은 사실 이런 것은 아니었다. 더 가혹하고 더 잔인하고, 보다 더 철저한 것이었을 것을. 관수나 석이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 살찐 암탉 같았던 젊은 날의 조준구, 여전히 살찐 암탉이지만 늙은 닭이 되어버린 조준구의 모가지를 비틀어야 끝날 원한이 이렇게 싱겁게 끝난 것이며, 끝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내 말이 그 말이다. 등장인물 못지 않게 여태 서희와 함께 복수를 다짐하며 책을 읽어오던 독자의 입장에서도 당황스럽다. 더 통쾌한 무엇을 기대했는데 조준구는 또 취할만큼 취해서 가버린 셈이다.

양반은 상놈들을 눌러 잡아야 저들의 보신이 되고 양반한테 개처럼 순종하는 놈일수록, 음, 천민이 제같이, 아니 제보다 한층 더 순종하길 바라는 게 이치 아니겄나? 그들의 이치란 말이다. 푸른 풀밭이나 눈 오는 곳이사 하누님 하시기 탓이겄지마는…… 사람이 한 일이야 사람의 손으로 뿌사야지. 임금이다 양반이다 상놈이다 천민이다 그거를 하누님이 맨들었나? 사람이 맨든 기라. 사람이 맨든 기문 사람이 뿌사부리야제.

상민들의 태도도 양반과 다르지 않다. 천민이라는 계급을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내가 생각해왔던 것 보다 훨씬 더 지독하다. 백정이라는 신분에, 그 지칭하는 말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이제까지는 제대로 몰랐던 것이다. 충격이 크다. 인도의 카스트제도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백정 열다섯 명을 옥봉교회에 나가게시리 주선을 했더란다. 그러니 우떻게 됐겄노? 최약국(崔藥局)을 위시한 몇몇 사람이 한사코 반대를 한 거지. 백정하고 한자리에서 예배를 볼 수 없다는 주장이었고, 이쪽에서는 이쪽대로 하누님 앞에서는 만인이 다 같이 예배볼 수 있다는 주장인데 서로가 팽팽하게 맞서다가 결국 최약국 일파가 예배소(禮拜所)를 따로 매련한 기라. 그러니 교회가 두 쪼가리로 갈라진 기지. 양파가 다 갈라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함씨로 서로가 밀고 나간 기지. 많지도 않은 교인이 두 곳으로 갈리어 예배를 보니 그 틈새에 끼인 백정들의 심정이란 기맥힜일 기라. 결국에는 사십구일 만에 백정들이 물러날 수밖에, 내 장인 말이 피눈물을 뿌리고 물러났다 그러더마. 피눈물을 뿌리고, 그랬일 기다. 이자는 사람 축에 끼는가 부다 하고 희망에 부풀었던 백정은 예수도 믿을 수 없었던 기지

교회 초창기에는 이랬단다. 지금은 아니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조춘(早春)에서 봄 한가운데로 성큼 건너가려는 시기에는 바람과 바람이 실어오는 흙먼지와 그 흙먼지의 내음과, 그리고 내음은 바위 틈에서 마른 잔디를 비집고 혹은 담장 밑에서 돋아나는 연하고 보송보송 살찐 풀잎의 촉감을 환기시킨다. 대지의 힘찬 숨결은 앙상한 나뭇가지로 뻗어 올라가고 어미 짐승이 새끼 상처를 핥아주듯이 풍설에 멍든 나무의 표피를 바람은 어루만진다. 얼음이 녹고 그늘을 드리운 강물은 정다운 어머니처럼 착한 아내처럼 산자락을 감싸 안으며 모질었던 겨울 얘기를 하면서 흐느껴 우는가. 까치는 날개가 찢어지게 나뭇가지를 물어 나르며 둥우리를 만들고 흙벽을 뜯어먹으면서도 아기는 자란다. 아아 그리고 가랑잎같이 매달려 겨울 바람을 견디어낸 번데기는 지금 무서운 경련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겨울의 죽음에서 떨치고 일어나려는 몸부림, 몸부림, 몸부림은 온 천지에 충만하여 신음하고 포효하고, 정녕 봄은 장엄하고 처절한 계절인지 모른다. 신비와 경이에 가득한 생명의 위대한 현장인지도 모른다.

천천히 천천히 몇 번을 읽어보았다. 그림은 아니지만 그림을 보는 듯하고 그 그림 앞에서 해설을 듣는 듯하다. 보이는 것 뿐만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들까지도 모든 것이 살아서 움직이고 있음이 느껴진다.

‘어째서 오천 원을 던져주었을까?’

장난이었는지 모른다. 장난치고는 엄청난 금액이며 방종한 호기가 아닐 수 없다. 천 원만 내주어도 감지덕지 받아서 개처럼 달아났을 것을, 아니 돈 한 푼 주지 않았어도 집문서는 찾을 수 있었다. 어쩌면 서희는 막판에 가서 지쳤는지 모른다. 혹은 자포자기했는지 모른다. 돈 한 푼 없는 알거지가 된 조준구를 두려워했는지 모른다. 싸움을 끝내고 싶지가 않아서. 허망하게 쉽게 끝이 나버린 싸움, 너무 쉽게, 싱겁게 끝나버렸다. 가슴을 물어뜯듯 아우성치며 부풀었던 보복의 핏줄, 풍설의 북방에서 밤마다 날마다 다짐하였던 맹세가, 이렇게 끝날 수는 없다. 십 년은 더, 조준구의 숨통을 눌러놔야 했었다. 정녕 끝이 났는가. 오천 원이면 투기사업에 모자라는 돈은 아니다.

귀찮아서 그랬을까? 몇 번을 싸워도 이길 수는 있는 힘이 있지만 계속해서 싸우기가 귀찮았던 것일까? 지금은 허무한 듯 하지만 나중에 더 통쾌한 무슨 반전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길...

“그래요? 누가 가든지 내가 공노인께 안부 전하더라 말씀하시오.”

서희는 남편 길상에게 대하여는 언급을 아니한다. 그런 만큼 괴로운 것을 혜관이 모를 리 없다. 친일을 더 해야겠다, 친일을. 그 말은 확실히 혜관을 감동시킨 것이다. 용정촌에 군자금을 보낸 행적을 은폐하기 위해 위장을 한다는 뜻인 것은 물론이지만 그 말은 서희의 괴로움, 서희의 갈등, 서희의 냉정, 서희의 총명을 웅변해주었던 것이다.

도대체 혜관과 서희가 무슨 대화를 하는 것일까하고 의아했다. 길상에게는 너무 서운하다. 분하다. 그런데, 길상에게 안부전하라는 말은 안했어도 독립군 활동을 위한 자금은 계속 보내겠다는 뜻으로 이해가 된다. 겉으로도 친일이고 이제껏 계속 친일로만 서술했기에 이 부분에서 처음 알았다. 2부와 3부 사이에 중요한 얘기들을 훅 건너온 듯 하다.

“자식이 셋인데 부치*가 꺼꾸로 안 박힌 다음에야, 칠거지악이 있어서 쫓아낼 기가, 설사 칠거지악이 있어도 삼불거(三不去)믄 못 쫓아낸다 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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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치: 눈동자에 맺히는 사물의 영상. ‘부치가 꺼꾸로 박힌다’란 대상이 거꾸로 보인다는 의미로 ‘실성했다’는 의미.

박경리 선생의 토지를 읽는 중요한 재미 가운데 하나다. 어린 아이가 새로운 단어를 배워갈 때의 즐거움이다. 부치...라는 단어를 이렇게 또 배운다. 물론, 생활에서 계속 써먹지 않으니 또 잊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런 단어 하나하나가 나올 때마다 반갑다.

너의 가난과 너에 대한 핍박을 너의 아버지 너의 형 탓으로 돌리는 것은 네가 없다는 얘기가 된다. 네가 없다는 것은 죽은 거다. 아니면 풀잎으로 사는 거다. 너는 너 자신을 살아야 하는 게야. 너의 아버지는 너 한 사람을 가난하게, 핍박받게 했지만 세상에는 한 사람이 혹은 몇 사람이 수천만의 사람들을 가난하게 하고 핍박받게 하고, 한다는 것을 왜 모르느냐 말이다! 지금 당장 목전의 원수는 일본이지만, 따라서 너의 형도 목을 쳐야겠지만, 제발 일하라 않겠으니 숨지만 말아라. 너의 자손을 위해서도, 너의 아버지의 망령을 평생 짊어지고 다니다가 너의 자손에게 물려줄 작정이냐 말이야!

거하게 술을 마신 후 길상이 한복에게 하는 말이다. 술은 마셨지만 한복의 마음 속 깊은 곳을 찌르고 울려주는 말이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 나에게도 하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누구의 탓으로 돌릴 것인가? 누구의 탓이라고 하는 순간 나는 나 자신을 살고 있는게 아닌 것이다. 모두가 내 탓이고 내 덕이고 내가 살아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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