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슬픈 예감은 틀리지가 않나?
어느 유행가의 가사 중 한 구절이다.
그런데 간혹 이 예감이 맞아떨어지는 경우가 있다.
우리 아들은 축구선수다.
이번에 팀과의 계약이 무산돼서 새로운 팀을 구해야 하는 상황이 생겼고 팀의 테스트에 임하게 되었다.
테스트 전날 나는 아들에게 부상을 최대한 조심하라는 당부를 매번 하지만 그날은 문자를 보내서 재차 당부를 했다.
지금 시기에 부상을 당하면 팀을 구하기가 정말 어려워지고 아들이 좌절할 수도 있을 것 같은 우려가 깊었기 때문이다.
테스트 당일 종료시간이 훌쩍 지났는데도 연락이 없었다.
항상 그런일에는 내가 동행을 하다가 아들 혼자 보내게 된 첫 테스트였기에 불안한 마음이 있었지만 별일 없을 것이라 마음을 다독이고 있었다.
그리고 아들의 전화가 왔다.
'아빠. 나 다쳤어.'
덜컥 가슴이 무너져버렸다.
얼마나 다쳤는지 알지 못하고 보지 못했기에 모든 것이 내 탓인 양 느껴졌다.
그렇게 아들은 다쳤고 회복하는데 두달정도 걸린다는 의사의 통보를 받았다.
이 번 겨울 테스트를 통해 팀을 구해야하는 아들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였다.
지금 아들의 마음은 어떨까?
아마도 눈 앞이 캄캄할 것이다.
팀을 구하지 못하면 어디서 운동할 것이고 자신의 꿈이 이대로 멈추어버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가득일 것이다.
갑자기 다가온 시련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혼란스러울 것이다.
그런 아들의 상황이 느껴지지만 도움을 줄 수 없다는 것이 속상하다.
무능한 부모가된 것 같기도 하고 어떤 도움을 주어야 하는 것이 옳은지 알 수가 없다는 것에 무기력해지기도 한다.
이런 상황에서 아들에게 부상기간동안 부상 부위를 제외한 훈련을 하는 게 옳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내비치고 싶지만 상처 받은 아들의 마음에 하나의 생채기를 더 남길지 모른다는 생각에 입을 다물고 있다.
다른 사람들의 이런 이야기에는 곧잘 아이를 믿고 기다려야한다는 말을 해주곤 했는데 정작 나에게 닥치니 조급함이 나의 너그러움을 붙들어 세운다.
믿고 기다리는 것이 정말 옳은 것인지 혼란스럽다.
채찍을 들고 휘둘러 끌고 가는게 맞는지?
나의 일이 되었을 때 현명하게 대처하는 방법서가 있었으면 한다.
그래도 더 가슴 아프고 막막할 아들을 믿고 기다려주는 게 맞을 것 같으면서도 내가 해결해주지 못해서 방관하는 것이 아닌지 걱정스럽기도 하다.
신은 우리에게 한 길을 막으면 다른 길을 열어준다고 하는데 막상 자신의 길이 막히면 다른 길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다.
그 길을 보는데까지 막막함을 견뎌야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지 자신 외에는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도 기다려보자.
스스로 어둠을 뚫고 나올 수 있도록 기다려주고 응원해주자.
내가 도와줄 것은 좀 더 쉽게 뚤고 나오도록 밖에서 두드려주는 것 밖에는 없으니 말이다.
알에서 나오려는 새끼에게 어미는 밖에서 부리로 알을 톡톡 두드려주고 기다리는 것이 전부인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아들은 알을 깨고 나올 것이다.